[경상매일신문=신일권기자] `주강(晝講)`이란 임금이 하루에 서너 번 신하들과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펼쳐놓고 읽는 것이다. 사서오경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고전을 통하여 조정의 당면 문제를 논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의견이 오고 가는 자리다. 퇴계(退溪) 이황과 남명(南冥) 조식 사후 선조가 김우옹에게 하문한 내용이 “조식은 사람을 어떻게 가르쳤는가?”였다. 이에 김우옹이 답변하기를 “조식의 박문(博文)과 궁리(窮理)는 이황에는 못하지만, 사람에게 정신(情神)과 기개(氣槪)를 가르쳤으므로 흥기 된 자가 많았는데, 최영경, 정인홍과 같은 자들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그의 답변에서 남명 조식 선생이 사람에게 정신과 기개를 가르쳤다는 말은 나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남명 선생을 공부하고 글을 쓰고자 선생 관련 자료를 찾아 읽고 영상을 봤지만, 어디부터 글을 시작해야 할지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내게 너무 큰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의미와 감동으로 다가왔던 선생의 모습을 생각나는 대로 정리했다. 남명(南冥) 선생은 처사로 평생을 살았다. 처사(處士)는 나라에서 불러도 벼슬에 나가지 않는 선비, 덕망이 높은 선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선생은 벼슬에 나서지 않고 평생 처사로 살았으며, 경(敬)과 의(義)의 수양론으로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자신을 경영하였다. 또한, 사대부로서 실천을 매우 중시하였는데, 그의 가르침은 임진왜란 때, 국난 앞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 바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제자(의병장)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다.남명 선생은 무모할 정도로 강직한 사람이었다. 명종이 단성 현감으로 제수했지만, “을묘사직소”이란 상소문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는 “문정 대비를 과부로 명종을 선왕의 고아로 칭하며 국사를 감당하지 못해 백성의 원망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비판”을 담을 정도였으니 죽음을 불사하고 옳고 그름을 논하는 선생의 강한 선비정신과 기개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을 끊임없는 깨어있음으로 경영하였다. 성성자(惺惺子)를 통한 매 순간의 일깨움, 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의미를 담은 내명자경(內明者敬), 밖으로 일을 옳게 판단하는 외단자의(外斷者義)를 새겨 넣은 경의검(敬義劍)을 차고 다녔다. 스스로에 대한 단호함과 무인의 기상을 뛰어넘는 기상을 본다.     그는 미래를 예측했고, 국난 앞에 목숨을 다해 헌신하는 제자들을 길러냈다. 남명은 그 살아생전 남해안에 왜구가 활개 치는 것을 바라보면서, 지형을 활용한 왜구 침략에 대한 대비를 논했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망우당 곽재우를 비롯한 정인홍, 김면 등 50여 명의 의병장의 모습은 실천하지 않는 유자(儒者)들과는 크게 대별되는 모습이다.     남명 조식의 사상은 오늘날 기업가 정신, 경영의 영역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경영자 스스로가 깨어있음으로 인해 끊임없는 변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자세, 이론과 담론에 국한된 생각들이 아니라 실천을 통한 문제 해결 방안 제시, 상황 분석을 통한 예측, 그리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물론 조직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구성원의 양성에 대한 진정성 등이다. 이와 관련 학문의 융합적 접근을 통한 시각이 필요하다.   나는 남명 선생을 바라보면 강단과 재야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분은 재야의 성리학자다. 강단에 비해 재야(在野)는 힘들다. 학문의 실천을 위해 풍찬노숙(風餐露宿)과도 같은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재야의 영역이다. 당시 많은 유학자들이 강단 영역을 추구했다면, 같은 성리학을 했음에도 남명 조식 선생과 그 제자들은 재야의 영역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시간이 되면 남명 선생이 후학들을 가르쳤던 지리산 영봉(靈峯)을 바라보는 산천재(山天齋)에 꼭 가보련다.     글 : 서용운, 계명대학교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겸임교수                주)소셜에듀텍코리아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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