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자동차를 집에 두고 지하철을 이용하여 시내에 나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엔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타보기로 했습니다. 동네 버스정류장 앞엔 빵집이 있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스레 빵집을 들릅니다. 난 1년 365일 다이어트 하는 여자라 빵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주려고 사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합니다. 빵집 옆엔 약국이 있습니다. 집에 필요한 약은 없는지 생각 해 보니 밴드를 사야할 것 같군요. 지난번에 막내가 병원놀이용로 다 쓰는 바람에 급하게 필요할 때 없어서 애를 먹었었지요. 약국 옆엔 김밥집이 있고, 그 옆엔 편의점, 또 그 옆엔 부동산, 그 옆엔 대형 마트…. 여느 동네에서나 볼 수 있는 상점들입니다. 승용차를 운전해서 다니는 날은 옆도 뒤도 볼 여유가 없습니다. 안전을 위해 오직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것이 숙명이니까요. 지하철은 빠르고 편리하지만 땅 속으로 다니므로 창 밖 세상 구경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버스는 창 밖 세상 구경과 사람 구경을 할 수 있고, 가다 섰다를 반복하니 느림의 미학도 있습니다. 게다가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걷다보면 또 하나의 세상이 펼쳐집니다. 늘 그 자리에 있는 똑같은 풍경들이지만 ‘걷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집까지 천천히 걸어가는 시간은 단 10분. 짧은 10분 동안이지만 이런 저런 생각들이 뇌리를 스칩니다.   마트 앞에 사람이 바글바글한 걸 보니 오늘은 할인행사라도 하는 가보다 생각하니 문득 20여 년 전의 동네 풍경이 떠오릅니다. 그 당시엔 배달음식 하나 시켜 먹을 곳이 없어 고작해야 짜장면이나 치킨이 전부였던 도시 외곽의 동네였지요. 어느덧 전국에서도 손꼽힐 만큼 인구가 많아졌으니 엄청나게 발전했구나. 이렇게 옛 생각에 잠길 즈음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바뀌자 또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집까지 가려면 아직 7~8분쯤 남았고 또각또각 하이힐의 뒷굽소리를 들으며 또다시 상념에 빠집니다. 걸을 땐 역시 운동화가 편한 걸 알면서도 아직은 빼딱구두를 포기하지 못하는 내가 우습기도 하고,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구두소리를 또각또각 내면서 우아하게 걷는 모양새가 사랑스럽기도 합니다. ‘난 80의 할머니가 되어서도 구두를 신을 거야.’ 생각하며 슬쩍 미소도 지어봅니다.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걷는 이 시간은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상념에 젖어 걷는 동안 어느덧 반을 지나 지하철 역까지 왔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의 중간 지점이 지하철 역입니다. 절반을 오고 나니 두 발로 걸으며 사유하는 철학자의 머릿속에서는 ‘반’이라는 개념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무슨 일이든 시작할 땐 끝이 막막해 보이더라도 `반`이라는 전환점이 지나고 나면 상황은 달라지게 마련이지요. 게다가 이 ‘반’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삶의 태도와 자세가 달라지기도 하니 반이라는 의미를 한번쯤 생각해 볼 일입니다. 두 사람의 농부가 각각 밭을 메고 있었습니다. 절반쯤 메고 나서 한 농부는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아이구, 아직도 반이나 남았구나” 그러나 다른 농부는 남아 있는 반을 보며 말했습니다. “아, 이제 반 밖에 안 남았구나” 반이나 남았다는 것과 반 밖에 안 남았다는 생각. ’이나’와 ‘밖에’의 차이는 비록 단어 한 끝 차이지만 그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일 것입니다. 모든 삶의 태도에 두 번째의 농부처럼 긍정적인 마음 자세를 지닌다면 비록 팍팍하고 녹록지 않은 우리네 삶일지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작이 반이다] 시작하는 순간 이미 반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시작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영국의 30대 백만장자 [레버리지] [결단]의 저자인 롭 무어는 말합니다. ‘지금 시작하고 나중에 완벽해져라’ 보통 사람들은 뭔가를 시작하기에 앞서 너무나 완벽하게 준비를 하느라 정작 시작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야에서 성취를 이룬 사람들 대부분은 먼저 시작하고 차츰 완벽하게 만들어 간다고 하니 시작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을 와서 사유한 `반(half)’. ‘반’은 또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절반, 반환점, 반나절, 생의 절반, 그리고 [절반의 책임론]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접촉 사고에서도 100대 0이란 비율은 없습니다. 피해자에게도 최소한의 부주의에 대한 책임은 있다는 쌍방과실이 적용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남 탓` 하기를 좋아합니다. ‘다 너 때문이야, 친구를 잘못 만난 탓이야. 부모를 잘못 만난 탓이야, 등등. 갖은 변명과 탓을 하고 심지어 날씨까지도 탓하곤 합니다. 무언가를 책임지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자기방어본능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면, 어떠한 불합리한 상황과 다툼의 순간에서도 [절반의 책임론]을 한번쯤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실수를 인정할 수 있는 솔직함과 책임지려는 용기’를 지닌 소수의 의인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 사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3%의 염분으로 바닷물이 썩지 않듯 언제나 적은 숫자의 의인들이 있어 세상은 발전하고 유지되어 왔으니까요 ‘나에게도 절반의 책임은 있어’ 라는 유연한 태도로 살아간다면 우리 사는 세상은 한층 둥글둥글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사색에 잠겨 걷는 사이 어느새 집 앞이네요. 우리 가끔은 걸으며 사색하는 철학자가 되어봅시다. 그리고 절반의 책임은 지겠다는 용기있는 태도로 살아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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