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에 가면 품관산아래 품관사(品官寺)라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 있다.
백제와 황산벌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화랑 관창(官昌)의 넋을 기리기 위해 아비인 품일(品日)이 창건한 사찰이다. 삼국통일 전쟁에서 백제를 치기위해 김유신 이하 신라군사는 부여에서 당나라 소정방군사와 합류키로 했다. 이때 태종 무열왕은 금돌성(상주 백화산성)에 주둔하면서 태자 법민을 당나라 소정방에게 보내 경과를 알리고 신라군사 5만을 파병한다. 이들은 오늘날 영동에서 수일간 야영을 한 뒤 탄현(대전)을 거쳐 부여로 진격했다. 명장 계백은 5천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맞이한다. 10배의 군사를 이끌고 간 신라군이지만 결사의지로 무장한 백제군을 뚫고 나갈 수 없었다. 두 세번의 실패끝에 김유신은 소년화랑을 단독 출격시키기로 다짐했다. 이때 품일의 아들인 15세 화랑 관창이 주저없이 말을 달려 적진으로 치달았다. 창을 휘두르며 적진에 나아갔지만 백제군사들에 사로잡혀 신라군영으로 돌려보내졌다. 아군진영에 와서 신발끈을 조이고 다시금 적진으로 돌격하지만 다시 사로잡혀 목이 베어져 신라진영으로 보내졌다. 이에 신라군사는 기세를 올려 5천결사대를 물리치고 백제를 멸망시킨다. 의자왕이 항복했다는 전갈을 받은 뒤 무열왕은 금돌성에서 나와 소부리성으로 어가를 옮긴다.
금돌성은 현재 상주 모동의 백화산성으로 추정하고, 소부리성은 부여의 부소성으로 추정한다.삼국을 통일한 후 품일장군은 황산벌에서 전사한 아들 관창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품관산 아래 품관사를 건립한다. 전장에 나갈때는 부자가 말머리를 같이하고 나아갔지만 돌아올때는 아들의 머리를 말등에 실려서 왔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으랴! 아비인 품일의 앞글자와 아들인 관창의 앞글자를 따서 품관사라 이름짓고 그 산을 품관산이라 명명했다. 당시 신라가 백제를 치기 위해 진격한 길을 더듬어 보면 두 갈래 진로를 떠올릴 수 있다. 낙동강 동안에서 상주를 거쳐 서쪽으로 나아가는 진로는 백화산의 반야사계곡과 화령을 거쳐 삼년산성이 있는 보은이 유력하다. 삼국사기에 백제와의 마지막 통일전쟁시 무열왕은 금돌성에 주둔했다고 했으니, 백화산성이나 삼년산성을 떠올릴 수 있다. 삼년산성은 둘레가 2km 내외로 규모면에서 작고 단순한 반면 백화산성은 그렇지 않다. 백화산은 상주와 영동에 걸쳐 있으며 성은 내외성 2겹으로 축성됐으며 성곽둘레는 6km가 넘는다. 성안에는 왕이 거주한 대궐터가 남아있고, 승전을 위해 제사를 지낸 제단이 갖춰져 있다. 잘 다듬어진 망루대가 요충지마다 있고 절터가 40여 곳에 이를만큼 그 규모가 웅혼하다. 조선후기까지 문경, 선산은 물론이요 충북영동과 보은까지 상주에 속할만큼 상주는 큰 고을이었다. 반야사계곡 7km는 신라에서 백제로 넘어가는 루트로 요충지이다. 또한 백화산입구 모동에서 시작하는 반야사 계곡은 신라에서 백제 심장부로 나아가는 최단 지름길이다. 신라에서 상주를 거쳐 백제전역으로 진출하는 루트로는 반야사계곡보다 삼년산성이 있는 보은 쪽이 더 유리하다.보은으로 통하는 길은 지대가 넓고 완만하며 한강으로 진출하는데 더 용이하다. 삼년산성은 부근의 견훤성처럼 석성이지만 전에는 토성으로 지어졌었다. 삼국사기 첨례왕조에 ‘사량벌국이 신라를 배반하고 백제와 내통하므로 석우로 장군을 보내어 평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량벌국은 보은이나 모동과 같이 백제와 가까운 국경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학자들은 사량벌국을 사벌국과 동일시하며 현재의 상주교외로 인식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현재 충북일대와 경북일대까지 세력을 뻗힌 상주를 비롯한 고녕가야세력은 고대 한반도 중부를 관할한 제국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특히 상주에서 황산벌전투의 전진기지 역할을 한 백화산성과 반야사계곡, 나아가 품관사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고 개발할 필요성을 재기한다. 이는 고녕가야의 역사적 사실과 함께 상주, 문경을 고양하는 더 없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