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 김남택은 세종조의 학자로서 1370년 3월15일 전라도 장수현 계남면 침령에서 태어났다.  1402년 문과에 급제 한 후 이조정랑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만년에는 형조판서를 지낸 동생 남중과 함께 낙향해 지내다가 운명했다.   황희정승이 지은 그의 조의문에 ‘군자는 하늘의 뜻을 받들고 어진이는 일의 기회를 살핀다. 때로 비가 내리는 것 같이 만물이 스스로 벗이 된다’고 했다.   예조판서 이정재는 선생의 묘갈명에 ‘그는 고녕가야국 왕의 후예로서 학문은 목은선생의 연원을 이었으며 덕망은 세상을 덮고 효행과 우애는 하늘이 낳았다’고 했다.   옛날 가락국에 다섯나라가 있었으니 그중 고녕가야국이 수도를 함창에 정했던바 이 왕실의 후예가 함창김씨가 됐으니 선생의 선조였다.   고려조에 이르러 사세봉군과 삼대상서의 혁혁한 가문의 전통을 빛냈으며 고관대작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함녕김씨들은 고녕가야가 멸한 후 사도성(현재 영덕군 영해일원)으로 사민(徙民)됐으며 그 후손 중 김종제를 중시조로 삼고 그로부터 9대손 김남택이 출현한다.   김남택의 사위는 이곡이며, 외손은 조선성리학의 비조 목은 이색이다. 아들 김요는 충숙왕때 급제했으며 2차 홍건적 침입시 공민왕의 안동 몽진시 호종했다. 김요의 손자가 바로 손재 김남택으로 형제가 이판, 형판을 지냈으며 그의 동서 송보산은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처조부 방촌은 고려왕조의 신하로서 이성계와 방원으로부터 집현전 대제학과 이조판서직을 제수받았으나 거절했다가 장수로 귀양왔다.   이렇게 형성된 장수군 삼판서댁은 장수의 자부심과 정체성의 요체로 추앙받고 있다.손재의 묘갈명을 지은 예조판서 이정제는 고종때의 관료로서 목은 이색의 후예로서 손재와 무관한 사이가 아니다. 묘갈명 내용가운데 김남택선생은 고녕가야왕 후손으로 목은이색의 학통을 이었다고 한 점이 이채롭다.   고녕가야가 멸망한 뒤 신라가 호족들을 흩고 분리했지만 그들은 면면히 연결망을 이어오면서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특히 사도성으로 사민당한 80여 호족 가운데서 덕원군 김종제가 중시조로 출현하고 다시 김남택이 출현해서 왕손의 가풍을 이었다.   김남택에게서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이 나오고 직계로는 함령군 김요가 고려말의 공신으로 등장한다. 김요의 손자 대에서 장수군에서 출사한 손재 김택이 나왔고, 목은의 후예 이정재가 묘갈명을 지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첨예왕시 사벌국을 멸하고 사벌주호민 80호를 사도성으로 이주시켰다.  사벌국을 폐하고 사벌주로 삼았으며 진흥왕시 상주일대를 일러 상락이라 불렀다. 사벌주 호민의 후예가 김종제를 비롯한 김남택, 김요로 이어지고 이곡과 이색도 이들의 후손과 친인척을 맺는다. 사벌국은 따로 사벌국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고녕가야를 일러 신라명으로 부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마치 대진국을 일러 중국에서는 대진이라 하지 않고 발해라고 불렀듯이 현재 사벌왕릉 주인공은 신라말의 박헌창이며 사벌국의 유물유적이라고 전해오는 것은 전무하다.   반면 고녕가야에 대한 기록은 수십군데며 유물유적도 두 손으로 꼽을수 없다. 조선후기 건립한 함창 신흥리에 소재한 금구제(金龜齊) 기문 첫머리에 ‘고녕의 남쪽에 금구제를 지었다’는 내용이 있으며 함창현지에는 10군데 고녕가야를 언급하고 있다.   아무 근거도 없이 일제 식민사학자인 쓰다 쏘기치와 나가 미치오는 임나일본부 이론을 내세워 함창고녕가야역사를 부정했다. 그의 직계제자인 이병도는 그들의 학설을 아무 비판없이 답습하고 김태식 이영식도 그대로 따른다.   상주박물관장 윤호필은 초기철기유물, 가야철갑옷, 남산고성, 가야무덤형식을 무시한 채 ‘아직 가야토기를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넋두리를 하고 있다.   심지어 상주와 함창이 문화권이 다르다면서 왜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하다고 한다. 국사는 식민사학을 전수한 역사가의 전유물이 아니며 이제 국민모두가 국사를 지키는 첨병으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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