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국사를 배우는 것은 나의 정체를 알고자 함이요 공동체인 나라의 뿌리에 닿고자 함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사상이나 종교적인 사명감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본 모습을 보고자 함이다. 그 어머니와 손을 맞잡고 나와 우리의 심연을 들여다 보고 싶은 회귀본능의 몸짓이다. 그런데 일제는 이러한 숭고한 뿌리의 문제를 그들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삼고자 조작하고 왜곡했으니 대표적인 사례가 함창고녕가야 역사조작이다. 식민사학자들의 손발이 돼 활약한 이병도는 함창고녕가야가 다른 가야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야라고 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말을 용서할 수 없어 일제의 대표적 식민사학자인 나가미찌오의 자료를 구했다. 겨우 찾은 자료는 일본고어가 많아서 보통 일본어 교사들이 번역할 수 없다 해 제일교포 학자에게 번역을 의뢰했다. 아니나 다를까 ‘함창고녕가야는 가야산과 멀리 떨어져 있어 가야라고 하기 어렵다’는 내용이 나왔다. 거기에다가 중국의 양나라 휴인국과 발음이 비슷하다고 엉뚱한 사설을 붙여 놓았다. 나가미찌오의 낭설 이래로 함창고녕가야는 진주고녕가야로 둔갑했으며 내로라 하는 가야학자들도 이구동성으로 그의 이론을 추종했다.가야산과 멀다는 이유 외에도 납득할 수 없는 요인들을 여러 사람들이 제시했지만 신뢰할 수 없는 조잡한 내용들이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것이 고녕가야나 금관가야처럼 이름이 붙어있는 가야는 원래 없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일연을 위시한 고려의 승려들이 육가야 등의 이름을 창작했다는 것이다. 그 연유는 신라 경덕왕 때 한문 투의 이름으로 지역명을 바꾸었기 때문에 경덕왕 전에는 고녕가야나 고녕군이라는 지명은 없다는 것이다. 고동람군이라는 지명이 이두식으로 표현된 것으로 볼 때 그 전에 한문 투의 지명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언어학자들도 다루기가 조심스러울 텐데 무슨 권위로 그들은 무소불위의 칼을 휘두르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겨레의 5천년 사직을 대표하는 정사와 야사를 이렇게 함부로 다뤄도 되는지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일제 강점기 금관총을 발굴한 총독부 관료들과 학자들이 발굴한 신라금관을 기생들에게 씌우고 술을 따르게 했다는 장면이 스쳐갔다. 일제 총독부관리들과 어용학자들이 신라금관을 대하는 태도와 한국의 가야사학자들이 우리 역사서를 대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같은 수준이다. 일제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지침과 학설을 추종하는 한 우리의 사학은 식민사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특히 김태식의 대표적 저서인 가야연맹사에서는 가야명칭을 일연이하 고려인들이 지어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는 육가야 지명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며 일본의 임나 13국이야말로 진정한 가야의 원래 이름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영식이 지은 가야제국사연구에서도 육가야 지명부정설은 김태식과 거의 동일하게 서술하고 있다.그동안 이들 내용의 원출처를 찾기 위해 아는 학자들에게 묻기도 하고 부지런히 쫒아다녔다. 그러던 중 최근 복기대 교수 등이 번역한 쓰다 소기치(1873~1961)의 조선역사지리를 구했다. 고녕가야를 설명한 내용에 ‘함창고녕가야는 김해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가야일 리가 없으며 가야라는 명칭도 있을 수 없다. 이는 후대인들이 그 지명을 갖다붙인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이쯤되면 이들의 정체를 알만하지 않는가? 나가미치오(1851~1908)와 쓰다 소키치는 20년의 차이가 있지만 일제의 `조선식민통치`라는 목표아래 일사불란하게 뜻을 같이했다. “함창고녕가야는 가야산과 멀다 그래서 가야일 수 없으며 고녕가야라는 이름 자체가 불가하다 일연을 비롯한 고려의 승려들과 후세인들이 창작했다”는 이러한 엉터리 논리를 우리나라 가야사학자들이 답습하면서 함창고녕가야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제 학교에서 국사를 올바르게 가르치고 배워야 우리 젊은 청년들 가슴에 뜨거운 애국심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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