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인 `코리언 특급` 박찬호(39·한화 이글스)가 마침내 선수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박찬호는 누구도 의문부호를 붙이지 못할 한국 야구 최고의 스타다. 한국 선수 중에서는 처음으로 `꿈의 무대`라는 메이저리그에서 최고의 투수로 활약하며 힘든 생활에 지친 국민을 향해 희망을 던졌다. 전성기를 끝낸 이후에도 재기를 거듭한 끝에 아시아 투수 통산 최다인 124승을 올렸고, 한·미·일 프로야구 무대를 모두 밟으며 도전을 이어갔다. 박찬호가 걸어온 발자국 하나하나가 한국 야구의 살아있는 역사가 됐다. ◆불안하던 강속구 투수,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다 = 박찬호가 공주고와 한양대를 졸업하고 1994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만 해도 성공을 점친 이는 드물었다. 학창 시절부터 최고의 강속구를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제구력 등 안정적인 면이 동기들보다 뒤진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다저스에 입단할 때에도 `개척자`로서의 가치가 주목받는 정도였다. 그러나 박찬호에게는 생소한 미국 생활을 이겨낼 만한 뚝심과 성실함이 있었다. 미국 문화와 여러 차례 충돌해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면서도 박찬호는 묵묵히 실력을 갈고 닦았다.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첫해부터 곧장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박찬호는 데뷔 2년 만인 1996년 4월7일(한국시간)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에서 4이닝동안 18타자를 상대로 삼진 7개를 뽑으며 산발 3안타 무실점으로 막아 첫 승리를 낚았다. 역사적인 한국인 투수의 메이저리그 첫 승리가 기록된 날이다. 이 시즌 5승5패를 기록한 박찬호는 이듬해 14승(8패)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두자릿수 승리를 달성했다. 이후 2001년까지 5년 연속으로 두자릿수 승리를 올리며 정상급 투수로 발돋움했다. 특히 2000년에는 한 시즌 개인 최다인 18승(10패)을 올리고 삼진 217개를 잡아내면서 평균자책점 3.27을 기록해 최고의 해를 보냈다. 박찬호의 승리는 개인의 영광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등 경제위기로 실의에 빠져 있던 국민은 박찬호가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장면을 바라보며 시름을 덜었다. 한국인들에게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국가대표 투수였다. ◆정상에서 찾아온 시련…‘오뚝이 인생’의 시작 = 박찬호는 2001년 시즌을 마치고 자유계약선수(FA)로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무려 6천500만 달러를 받으며 계약, 선수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인생 최고의 시기에 시련이 닥치면서 부진과 재기를 거듭한 `오뚝이 인생`이 시작됐다. 2002년 9승(8패)에 그치면서 주춤한 박찬호는 이듬해 허리 부상의 여파로 고작 7경기에 나와 1승(3패)을 거두는 데 그쳤고, 2004년에도 4승(7패)밖에 올리지 못해 `먹튀`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옮긴 2005년 마침내 통산 100승 고지를 밟고 시즌 12승을 거두면서 부활하는 듯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2006년 샌디에이고에서 7승을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매년 팀을 옮겨 다녔고,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잔 부상이 많아져 좋은 흐름이 여러 차례 끊겼다. 뉴욕 메츠로 옮긴 2007년에는 한 경기에 등판해 4이닝 동안 무려 7점이나 내주며 패전 투수가 되면서 더는 기회를 잡지 못했고, 다저스로 돌아간 2008년에는 4승을 올리는 데 그쳤다. 하지만 7년 만에 돌아온 친정팀 다저스는 박찬호 선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박찬호는 다저스에서 본격적으로 중간 계투 보직을 맡기 시작해 평균자책점 3.40의 좋은 성적을 냈다. 박찬호는 선발 투수로 재기하고자 이듬해 필라델피아로 팀을 옮겼지만, 선발진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중간 계투로 주로 나서면서 3승을 올렸다. 계투진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는 감격을 누린 박찬호는 이번엔 첫 우승의 꿈을 좇아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구단인 뉴욕 양키스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다시 찾은 뉴욕은 여전히 박찬호에게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박찬호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27경기에 나와 2승(1패), 평균자책점 5.60에 그쳤고, 결국 구단에서 방출 대기 조치를 당했다. 자칫 소속팀 없이 시즌을 마쳐야 할 위기에까지 몰렸던 박찬호는 가까스로 피츠버그와 계약하면서 메이저리그에 잔류했다. 그리고 마침내 통산 124승째를 올려 은퇴한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통산 123승)를 제치고 메이저리그의 아시아 출신 선수 통산 최다승 기록을 새로 썼다. 1994년 LA 다저스에 입단해 17시즌을 뛰면서 467경기(선발 287경기)에 출전한 끝에 달성한 대기록이다. 이로써 박찬호는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야구 선수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역사의 주인공으로 당분간 남게 됐다. ◆일본 거친 ‘금의환향’…고향에서의 선수 생활 = 마지막 목표였던 124승을 달성하고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맞아 종착역을 고민하던 박찬호는 2010년 12월 일본 진출을 선택했다. 1년간 총 220만 달러에 계약한 박찬호는 그러나 고작 7경기에 출전해 1승5패와 평균자책점 4.29로 초라한 성적을 남긴 채 2011년 10월 방출 통보를 받았다.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한국에서 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박찬호는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예외 규정을 통해 그를 받아들인 덕에 미국과 일본의 프로 선수로서 18시즌을 거친 뒤에야 한국 무대를 밟게 됐다. 일본에서 워낙 성적이 좋지 않았던 터라 실력에 의문 부호가 따라붙었지만, 박찬호는 꿈의 무대를 호령한 메이저리거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것은 증명했다. 정규리그 첫 등판인 4월12일 청주 두산전에서 6⅓이닝 2실점으로 감격적인 첫 승리를 따낸 것을 시작으로 올 시즌 5승10패와 평균자책점 5.06을 기록했다. 후반기 들어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하고 세월의 무게를 절감한 박찬호는 결국 두 달 가까이 고민한 끝에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한국 나이로 40세. 불혹의 나이에 19시즌을 지켜 온 프로야구 마운드를 내려가게 된 것이다. 미국, 일본, 한국을 거치면서 통산 2천156이닝을 던지며 130승113패 2세이브와 평균자책점 4.40이 박찬호가 남긴 기록이다. 올해 10월3일 홈구장인 대전에서 열린 KIA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해 5⅔이닝 5실점(3자책)으로 패전투수가 된 것이 박찬호의 마지막 등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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