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는 1980년대 후반 언더그라운드에서 `지존급` 댄서였다. 주위에는 늘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 등 당대 대표 댄스 가수가 북적였다. 신인 가수의 `사이드`에서 춤출 위치가 아니었다. 그의 꿈 또한 최고의 댄서였다. 1991년 함께 춤춘 양현석으로부터 이태원 카페 `도시선언`에서 서태지를 소개받으며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최근 청담동 한 카페에서 인터뷰한 이주노는 “내 꿈을 한방에 잠식시킨 건 서태지의 음악이었다”며 “그 음악을 들으며 `이게 혁명이라면 혁명가 옆에서 그 일을 돕는 것도 영광`이라고 느꼈다. 그때 댄서 이상우를 버리고 서태지와아이들의 이주노가 됐다”고 말했다. 그의 결정에 당시 댄서 후배들은 소위 `난리가 났다`. 그러나 그는 "서태지의 왼쪽 팔이든, 오른쪽 다리가 되든 시작점의 역할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돌아봤다. 1992년 3월23일 서태지와아이들의 1집 `난 알아요`가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딱 20년이 흘렀다. “20년이 너무 빨리 지나갔어요. 달리 말해 그때가 엊그제처럼 가깝게 느껴진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죠. 양현석, 서태지, 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많은 일이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20년과는 좀 달라요.” 그가 20년을 돌아볼 때 머무는 지점은 1집을 준비하던 시기. 그는 “`난 알아요`를 준비하고 활동하던 시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어떤 음반 하나, 어떤 시절 하나 놓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겠지만 뭉뚱그려 회상하면 결국 데뷔 시절이다”고 말했다. “1992년 4월 MBC TV `섹션 TV 연예통신` 첫회에 신인 가수를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죠. 우리는 `난 알아요`로 76점을 받았어요. 첫회였으니 점수가 높은지 낮은지 판단 근거도 없었죠. 그런데 이후 길거리 테이프 판매 리어카와 레코드점에 우리 음악이 도배됐어요.” 서태지와아이들은 1집부터 1993년 2집 `하여가`, 1994년 3집 `발해를 꿈꾸며`, 1995년 4집 `컴 백 홈`까지 잇달아 신드롬을 일으켰다. 힙합, 메탈, 록, 갱스터랩, 국악 등 다양한 장르를 접목한 음악으로 파란을 일으켰다. 이주노는 “당시 우린 연예인이 구경하는 연예인이었다”며 “탤런트들은 우리가 리허설을 하면 뛰어나와 구경했다.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조차 우리를 신기하게 여겼다. 당시 우리로 인해 파생된 상품으로 상업적인 효과를 본 사람이 꽤 되겠지만 우린 노래하고 춤추는 것밖에 몰랐다”고 웃었다. 당시 서태지와아이들의 음악을 주도한 건 서태지. 이주노는 “음악 콘셉트는 서태지가 관장했고 춤과 패션 등의 영역은 주로 나와 양현석 몫이었다"며 "서태지는 본연의 록 음악에 랩, 댄스, 국악 등 장르를 국한하지 않고 접목했다”고 설명했다. “3집 `발해를 꿈꾸며` 때 서태지의 음악 색깔이 좀 바뀌었죠. 서태지가 청소년들에게 끼치는 문화적인 책임감을 갖고 만든 음반이었기에 대중가요의 개념을 올라선 형태였어요. 그래서 4집 `컴 백 홈` 때는 저와 양현석이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서태지와아이들다운 음악이면 어떨까`란 의견을 내 4집 때가 우리의 입김이 가장 많이 들어간 것 같아요.” 청년문화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서태지와아이들의 음악은 예상치 못한 반발에도 부딪혔다. `시대유감` 노랫말은 공연윤리위원회 가요음반 전문 심의위원들로부터 철퇴를 맞았고 `교실이데아`의 테이프를 거꾸로 돌리면 `피가 모자라`란 가사가 들린다며 사탄 찬양가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주노는 “그때는 미디어가 지금보다 한정된 시대여서 집중력과 영향력이 강했다”며 “기존 개념을 끌고 가며 안정을 추구하는 세대에게는 서태지와아이들이 하는 것들이 도전적이고 불편하고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시대를 끌고 가는 사람들은 안정적이길 원하는데 우리는 개혁적이었기에 방어하려는 움직임이 많았다. 새로운 문화가 접근할 때는 마찰과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고 돌아봤다. 사회 장벽에도 승승장구하던 이들은 1996년 1월22일 갑작스런 해체를 발표했다. 이주노는 갑작스러운 결정이 아니라 이미 4집 녹음을 하며 세 멤버가 합의한 부분이었다고 했다. “이유는 기자회견 때 서태지가 말한 그대로예요. 대중음악인으로서 많은 관심이 무겁게 느껴졌고 휴식이 필요했어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고 각자의 길도 있었기에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는 해체 후 1996년 영턱스클럽을 데뷔시키며 일찌감치 음반제작자로 성공하는 듯 보였다. 당시에는 서태지와아이들로 벌어들인 수익 덕에 땅, 아파트 세 채, 현금까지 자산도 꽤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을 지키지 못했다. 이주노는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춤만 췄고 이후 연예인으로 살았기에 사회 적응력이 부족했다”며 “그때는 주위 사람들의 말만 믿고 땅 문서 주고 집 한 채 팔며 내걸 지키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데 잃어버리며 경험했기에 공부했다고 생각한다”고 웃었다. 그는 현재 JFC엔터테인먼트를 경영하며 곧 데뷔시킬 신인을 양성하고 있다. 또 지난해 가정을 꾸리고 아빠도 됐다. 그가 지금 다시 듣는 서태지와아이들 음악은 어떨까. “해외에 나갈 때 서태지와아이들 시절 음악을 MP3로 가끔 들어요. 시간이 지나서인지 지금은 우리가 활동했을 때보다 더 깊이있게 듣게 되는 것 같아요. `그때는 서태지가 이걸 이렇게 풀었구나`라며 웃음도 짓게 되죠. 역시나 그래도 충분히 훌륭한 음악이더군요. 하하.” 연합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 제보하기
[메일] jebo@ksmnews.co.kr
[카카오톡] 경상매일신문 채널 검색, 채널 추가
유튜브에서 경상매일방송 채널을 구독해주세요!